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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9일 수요일

너무도 비싼 즐거움의 가격이여 - <악의> (1996년작, 히가시노 게이고)


간만의 장르문학. 책을 대여할 곳이 마땅치 않고, E-book 이라고 나온 것들을 읽으려면 컴퓨터 모니터로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봐야 하니, 결국 독서를 위해선 큰맘 먹고 책을 사야만 한다. 게다가 빌어먹을 도서정가제 덕분에 책의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아니다. 이쪽 이야기는 조금 나중에 하도록 하자.

책은 굉장히 재미있다. 90년대 스릴러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소설.

범인은 초반에 밝혀지고, 범인이 숨긴 동기를 찾는 것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굉장한 포인트는, 범인이 드러나는 순간까지를 잘라내어도 한 편의 단편 추리소설로 볼 수 있을만큼 밀도가 높다는 것이다. 책 초반 범인과 형사의 짧은 공방만으로 독자들은 이들의 영리함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형사는 결코 멍청한 실수를 하지 않으며, 범인은 의외의 부분에서 함정을 준비한다. 덕분에 수사의 진행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이게 되며, 그것을 비트는 범인의 안배는 더더욱 드라마틱해진다.

다만 소설의 제목이자 범인이 그토록 숨기려 애썼던 동기인 '악의'의 정체는 다소 맥이 빠진다. 이런저런 사연이 겹쳐서 살인을 할 정도의 악의가 발현했다는 것인데, 나는 명료하지 못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피해자의 돈 혹은 명예를 갈취하고 싶었다는 내용이라면 더 좋았을 듯.

감상을 정리하자면 95%만족. 대단한 흡인력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추리물의 경우 발원지는 에드거 엘런 포로 대표되는 영미권이겠으나, 현재 그 본질을 가장 잘 이어받은 건 일본인 것 같다. 영미권은 분위기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인 나머지 정작 극을 이끌어 갈 스토리가 뒷전으로 밀린 느낌. 아니면 과도한 현실성에의 집착 때문에 플롯의 복잡화를 극단적으로 지양하는 중일지도.

앞으로도 가능하면 일본발 소설들을 위주로 장르문학을 탐독할 예정이다. 그러면 이제 다시 도서정가제의 이야기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이 개같은 놈들은 지금 취미로 독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책 가격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놨을까. 소규모 서점을 살려? 애초에 정가구매 강요하면 누가 책을 산다고 정가제로 서점을 살리려 할까. 왜 강남에 집있는 놈들이라 정가로 팔아봐야 껌값인 책에 구매욕이 떨어지네 마네 하는게 전혀 이해가 안되나보지? 빌어먹을 돌대가리 새끼들.

14000원에 산 책을 3시간만에 주파하고 책장에 꽂을 땐 만감이 교차한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3시간에 14000이라니, 넷플릭스에 이 돈을 쓰면 몇 명이서 한 달동안 꼴리는 시간에 꼴리는 영화/드라마를 몇백 시간이던 꼴리는 만큼 볼 수 있고, 게임을 해도 세일기간에 지르면 S클래스 게임을 몇 개는 살 수 있다. 앞으로 영화는 영화관에서만 보십시오 하면 누가 영화를 계속 쳐보고 있겠나. 게임은 정가로만 사라고 하면 어떤 미친놈이 꾸역꾸역 그걸 계속 사겠나.

정가제가 최소 2020년까지 유지된다는데, 발안자 아가리에 엿을 박스째로 쑤셔박고 싶은 기분이다. 좆같아서라도 정가로는 안 산다. 주변의 헌 책방이나 뒤적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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