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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1일 금요일

란포는 그냥 오타쿠 아니었을까? - <외딴 섬 악마> (1930년작, 에도가와 란포 저)


밀실살인으로 애인을 잃은 주인공. 탐정 친구에게 의뢰해보지만 얼마 후 친구 역시 살해당하고 만다. 그 때, 과거의 동성 연인이었던 자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겠다며 접근해오는데...

나는 왜 작품에 대한 후기를 쓸 때 해당 작품의 출시년도에 집착하는가? 작품을 평가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 감화되어 미스터리 소설을 쓰게 되었고, 현재 일본에서 미스터리의 아버지 뻘 되는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대가'일까? 혹은 평범한 사람일까?

개인적인 의견은, 비록 내가 란포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지만서도, 후자라고 생각한다. 오만가지 쌍욕을 다 들어쳐먹을 발언이지만 글쎄, 다분히 상업적인 이 작품의 문장 속에서 나는 딱히 대가의 면모를 찾을 수 없었다. 익숙한 수준의 기괴함과 적당한 트릭, 크게 놀라움 없는 드라마와 반전.

상업적으로 재미없는 소설인가? 그렇지는 않다. 문장은 흡인력이 있고, 자극적인 설정들은 독자의 흥미를 잡아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좋은 킬링타임용 소설이다.

란포는 '대가'인가?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출시년도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같은 작품도 지금 보면 밋밋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장르의 시초였다. 그런 작품이 지금에 와서도 훌륭한 킬링타임 역할을 해낸다면, 그건 장르물 중의 대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1930년. 란포의 기괴함은 당시 독창적이었을까? 글쎄. 난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발간된 년도를 찾아봤고, 어쩐지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었다. 표현주의 영화를 아는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같은 것들. 어딘가 미쳐있는 인물들과, 일그러진 형태의 세트와, 창백한 분장과, 그 모든 것을 엮는 기괴한 스토리. 1차대전 패전국의 우울이 응집된 듯한 그 화면이 란포의 소설과 오버랩된 것이다. 일본이 영화상영을 시작한 것은 상영기가 발명된 지 단 1년 후부터였다. 보지 못 했을 리 없다. 란포의 세계는, 최소한 이 작품에서는 포의 소설과 표현주의 영화들을 전부 본 사람이 응당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내용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B무비를 보는 힙스터들이 그렇듯, 아마 란포도 일본 힙찔이 1세대쯤 되는 인물이었겠지. 그는 장르를 처음 들여왔고, 그래서 장르의 아버지였지만, 대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에드거 앨런 포를 기대하고 란포의 소설을 집어들었지만, 아쉽게도 포는 한 명 뿐이었다.

뭐? 고작 1작품 읽어보고 뭔 말이 그렇게 많냐고? 팩트다. 다른 작품은 또 비범할지도 모르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여담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잘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트릭이 있다. 특히 밀실 트릭이 그랬는데, 딱히 이해하려 들지 않고 넘어가도 큰 상관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런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다'라고 유세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실제 작품들의 이름을 소설 안에 늘어놓는 것은,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마이너스 요소인 것 같다. 특히 장르물에서 다른 장르물의 이름을 꺼내는 것은 뭐랄까, 자살행위? 안그래도 익숙한 요소를 더욱 익숙하게 만들고, 기껏 새롭게 변주해놓은 부분들의 신선함을 깎아먹는 느낌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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