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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5일 금요일

단계별 스트레스 공감테스트 - <지옥의 묵시록> (1979년작,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마틴 쉰 주연)


베트남전, 한 엘리트 장교가 베트남전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고 탈영하여 원주민들을 포섭해 게릴라가 된다. 명망있는 장교의 탈선이 군 전체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한 정부에선 마틴 쉰에게 이 장교의 암살을 명령하는데.

워낙 유명하지만 또 워낙 오래된 영화라 이제사 보게 되었다. 무척 우울한 날이라, 뭔가 좀 더 우울한 영화가 없나 했는데 글쎄.

영화는 탈영장교 말론 브란도를 암살하러 가는 마틴 쉰과 수병 일행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진행된다. 제목이 <지옥의 묵시록>인 이유도 그들이 이동하며 전장의 지옥도를 마주친다는 그런 의미인 듯.

주인공 일행이 마주치는 사건들은 각각 의미하는 바를 가지고 있고, 관객들은 역사적 사전지식을 통해 그것을 이해한다. 개봉한 당시는 베트남전 후 1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었으니 역사랄 것도 없었겠지. 생각해볼만한 점은, 관객들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 사건의 상징성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객은 인물들의 행동도 이해해야 한다.

아무 정보도 없이 보았을 때, 인물들은 마치 무작위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가 '스트레스'라고 생각한다. 전쟁이라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극단으로 몰리는 사람들. 감정적 내러티브가 수없이 생략된 인물들의 드라마는, 관객이 직접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까지 몰려봤지를 테스트하는 것 같다. 인물들의 '그 행동'에 동기를 몰라도 공감할 수 있는가? 인물들의 상황은 점점 더 극단적이 되고, 더 큰 스트레스에 놓여봤던 관객들만이 영화를 끝까지 공감할 수 있다. 사실 당시에는 관람객 전원이 베트남전을 겪어본 세대였을테니 굳이 깊은 설명이 필요 없었겠지. 자연스러운 생략 아니었을까.

영화의 종반부, 미쳐버린 말론 브란도(탈영장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를 지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에 공감하는 듯한 마틴 쉰. 그들은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일까. 혹자는 영화를 반전주의적인, 특히 베트남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은 메시지를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영화의 종반은 분명한 헛소리로 채워져 있다. 말론 브란도의 대사는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논리적 평형기관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영화는 내내 베트남전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다, 스트레스에 몰린 나머지 마지막 순간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말론 브란도를 신앙하며 취재하려 드는 사진기사가 나온다. 그는 브란도의 대사를 '변증법'이라 칭하며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것을 들은 브란도는 역정을 내며 그를 쫓아버린다. 마틴 쉰은 브란도가 역겨운 반역자로서가 아닌 군인으로서 죽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지금에 와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명예로운 군인으로 돌아가 처형당하고 싶다는 말일까? 아닐 것이다. 그는 '군인이었을 시절에' 죽고 싶어했다는 말로 들린다. 아직 그의 평형기관이 망가지기 전에, 그가 거쳤을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지 말고 그냥 죽었었더라면 하는 후회일 것이다. 인물들은, 영화는, 이제 베트남전이 무엇이었고, 어찌 된 일이었던 별로 상관없게 되었다. 인물들은 그저 죽고 싶을 뿐이며, 영화는 베트남전에서 돌아왔던 사람들의 절망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들과 공감하고, 그 사실만으로 조금은 위로하는 그런 작품으로 기능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살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자살은 커녕 채혈핀으로 손가락을 찌르는 것 조차도 직접 하려면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외적인 이유로 죽는 것은 쉽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영상을 본다. 강도 등이 들어와 맨 먼저 본 사람의 머리에 총을 쏜다. 사람은 그 즉시 생명이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쓰러지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 죽는 것은 어렵지만, 남에게 죽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인 것이다. 잠이 들며 다음날 일어나지 않고 영원히 잠드는 일을 소망한다. 행복이 있다면 그런 일일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도, 나 같은 사람들도 그것을 바라고 있다.


사실 위의 해석은 모두 틀렸다. 영화는 말론 브란도의 죽음을 소의 도살과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진정 자비로운 죽음을 뜻했다면 브란도는 간결하게, 큰 고통을 보이지 않고 죽었어야 했다. 목이 반쯤 썰린 채로 몸부림치며 피를 뿜는 소와 동격이 되어서는 안됐다.

고로 위의 글 전부는 죽고싶은 도태-한남충의 뇌내망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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