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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1일 목요일

겸허하라! 친히 우민들에게 추리소설을 하사하시니 - <철서의 우리> (교고쿠 나츠히코 저)


어느 날 산사태로 무너진 산 아래에서 발견된 서고, 그 산 위에 존재하는 유래불명의 사찰 명혜사. 서고에 있던 책들을 감정하기 위해 찾아간 고서점주 일행, 명혜사에 예정된 명상수행 중 뇌파검사 건의 사전답사를 온 잡지사 일행, 우연히 명혜사의 승려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골동품상... 여러 인물들이 뒤섞인 그 자리에서 승려들이 하나둘 기괴한 모습으로 살해당하는데.

지식을 알고자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난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고, 자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공부할 마음이 드는 것이 진정 알고자 하는 자세일 것이라고.

책은 무척이나 어렵다. 일단 등장인물들이 승려와 그에 관련된 사람들인 만큼 일본불교에 대한 지식이 전반적인 사건이해에 필수적이며, 그만큼 책 내에서 인물들의 입을 빌려 기초지식을 설파하고 있다. 그런고로 평소보다 한참 느린 속도로, 결코 얇지 않은 책의 분량을 꾸역꾸역 읽어나가야 한다.

선승들의 명상은 그들이 말하는 선을 깨닫기 위함이다. 명상 중에는 특수한 상태들을 겪기 마련이나, 이런 것들은 마경(魔景)이라 하여 겪지 않은 듯 넘겨야만 한다. 이른바 깨달음과 뇌의 상태이상, 둘을 구분하는 것이다.

매력적인 책의 흐름은 우리를 단숨에 마경으로 집어넣는다. 분명 책에 쓰여진 내용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이해했다 해도 빙산의 티끌만한 얼음조각만도 못한 작은 글뭉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를 이해하게 된 것만 같다. 그들의 명상, 그들의 깨달음, 불가해한 살인사건의 진행과 동기. 선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추리소설의 틀을 빌린 지식의 마경은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를 유혹한다. 너는 알고 있다. 너는 이해했다.

철서는 쥐 모양을 한 일본의 요괴이다. 하지만 제목은 왜 철서의 '우리'일까. 그렇게 쥐들이 우글거리는 '우리'의 다중적인 의미를 깨달으면서 나는 책을 덮었다. 마경(魔景)이다. 나는 자신에게 질문한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고, 자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책의 지식을 공부할 마음이 드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마경(魔景)은 없다. 나는 그렇게 무지하며 게으른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지식이란 참 여러 가지 얼굴을 가졌다. 가장 퍽퍽하고 텁텁한 모양의 지식만을 끝없이 파내려가는 소위 지식인들에게 찬사를. 하지만 어디 모든 사람이 그렇겠는가. 이 책은 말하자면 지식의 롤러코스터다. 수많은 지식들이 가장 엔터테이닝한 형태로 우리를 스친다. 겸허하라! 우매한 자들에게 지식을 즐거움으로서 허락하셨으니. 다만 즐기는 방법 외에 더할 도리가 있겠는가.

* 아무래도 책의 단점은 확실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추가분을 적는다. 작가 특유의 작위적인 사건진행은 덜 나오는 편이나, 사건이 시작되기까지의 상황이 매우 작위적이다. 사건의 관계자가 명혜사 승려와 배정받은 형사를 제외하면 전부 주인공 일행과 지인이거나, 한 단계 건너 지인이라는 것. 아무래도 시리즈에 레귤러로 나오는 캐릭터들이 많고, 그들을 꾸역꾸역 등장시키려는 작가의 욕심, 혹은 캐릭터설명을 손쉽게 하려는 작가의 태만인 듯.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면 넘어갈 수 있으나, 개연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부분이라 거슬릴 확률이 높다.

* 후라소데를 입은 여자아이 괴담은 사건과 상당히 괴리감이 있다. 맥거핀 혹은 눈속임에 가까운 사건이지만, 마치 <사이코>가 영화의 끝까지 돈다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 다만 모든 점을 감안하고도 소설이 재밌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일본불교의 이야기에 기괴한 살인사건을 버무려 무엇보다도 흥미롭게 전개했다. 위의 단점은 나에겐 <스타워즈>의 데스 스타가 환풍구에 한 발 맞고 폭발해버리는 수준의, 처음 보면 굳이 신경쓰이지 않을 것이었으나, 이런 걸 엄청나게 싫어하는 사람도 존재하기에 언급하였다.
간만에 신선함과 무게감, 사건의 플롯이 제대로 잡힌 걸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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