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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1일 목요일

겸허하라! 친히 우민들에게 추리소설을 하사하시니 - <철서의 우리> (교고쿠 나츠히코 저)


어느 날 산사태로 무너진 산 아래에서 발견된 서고, 그 산 위에 존재하는 유래불명의 사찰 명혜사. 서고에 있던 책들을 감정하기 위해 찾아간 고서점주 일행, 명혜사에 예정된 명상수행 중 뇌파검사 건의 사전답사를 온 잡지사 일행, 우연히 명혜사의 승려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골동품상... 여러 인물들이 뒤섞인 그 자리에서 승려들이 하나둘 기괴한 모습으로 살해당하는데.

지식을 알고자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난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고, 자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공부할 마음이 드는 것이 진정 알고자 하는 자세일 것이라고.

책은 무척이나 어렵다. 일단 등장인물들이 승려와 그에 관련된 사람들인 만큼 일본불교에 대한 지식이 전반적인 사건이해에 필수적이며, 그만큼 책 내에서 인물들의 입을 빌려 기초지식을 설파하고 있다. 그런고로 평소보다 한참 느린 속도로, 결코 얇지 않은 책의 분량을 꾸역꾸역 읽어나가야 한다.

선승들의 명상은 그들이 말하는 선을 깨닫기 위함이다. 명상 중에는 특수한 상태들을 겪기 마련이나, 이런 것들은 마경(魔景)이라 하여 겪지 않은 듯 넘겨야만 한다. 이른바 깨달음과 뇌의 상태이상, 둘을 구분하는 것이다.

매력적인 책의 흐름은 우리를 단숨에 마경으로 집어넣는다. 분명 책에 쓰여진 내용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이해했다 해도 빙산의 티끌만한 얼음조각만도 못한 작은 글뭉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를 이해하게 된 것만 같다. 그들의 명상, 그들의 깨달음, 불가해한 살인사건의 진행과 동기. 선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추리소설의 틀을 빌린 지식의 마경은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를 유혹한다. 너는 알고 있다. 너는 이해했다.

철서는 쥐 모양을 한 일본의 요괴이다. 하지만 제목은 왜 철서의 '우리'일까. 그렇게 쥐들이 우글거리는 '우리'의 다중적인 의미를 깨달으면서 나는 책을 덮었다. 마경(魔景)이다. 나는 자신에게 질문한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고, 자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책의 지식을 공부할 마음이 드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마경(魔景)은 없다. 나는 그렇게 무지하며 게으른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지식이란 참 여러 가지 얼굴을 가졌다. 가장 퍽퍽하고 텁텁한 모양의 지식만을 끝없이 파내려가는 소위 지식인들에게 찬사를. 하지만 어디 모든 사람이 그렇겠는가. 이 책은 말하자면 지식의 롤러코스터다. 수많은 지식들이 가장 엔터테이닝한 형태로 우리를 스친다. 겸허하라! 우매한 자들에게 지식을 즐거움으로서 허락하셨으니. 다만 즐기는 방법 외에 더할 도리가 있겠는가.

* 아무래도 책의 단점은 확실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추가분을 적는다. 작가 특유의 작위적인 사건진행은 덜 나오는 편이나, 사건이 시작되기까지의 상황이 매우 작위적이다. 사건의 관계자가 명혜사 승려와 배정받은 형사를 제외하면 전부 주인공 일행과 지인이거나, 한 단계 건너 지인이라는 것. 아무래도 시리즈에 레귤러로 나오는 캐릭터들이 많고, 그들을 꾸역꾸역 등장시키려는 작가의 욕심, 혹은 캐릭터설명을 손쉽게 하려는 작가의 태만인 듯.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면 넘어갈 수 있으나, 개연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부분이라 거슬릴 확률이 높다.

* 후라소데를 입은 여자아이 괴담은 사건과 상당히 괴리감이 있다. 맥거핀 혹은 눈속임에 가까운 사건이지만, 마치 <사이코>가 영화의 끝까지 돈다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 다만 모든 점을 감안하고도 소설이 재밌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일본불교의 이야기에 기괴한 살인사건을 버무려 무엇보다도 흥미롭게 전개했다. 위의 단점은 나에겐 <스타워즈>의 데스 스타가 환풍구에 한 발 맞고 폭발해버리는 수준의, 처음 보면 굳이 신경쓰이지 않을 것이었으나, 이런 걸 엄청나게 싫어하는 사람도 존재하기에 언급하였다.
간만에 신선함과 무게감, 사건의 플롯이 제대로 잡힌 걸작을 읽었다.


2019년 2월 15일 금요일

아저씨 좀 부담스러운 분이셨네요 - <켄 정, 크레이지 리치 코리안의 고백> (존 추 감독/ 켄 정 주연)


뭔가 포스터가 있는 영화가 아니라서 넷플릭스 정보란을 그대로 캡쳐해왔더니 이미지가 너무 작게 들어가네. 관심있으면 이미지를 클릭해서 보길 바란다.

요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라는 영화가 흥행했다. 이건 켄 정 코미디언의 넷플릭스 스페셜 코미디쇼를 그대로 찍은 다음, 한국제목만 <크레이지 리치 코리안>으로 번역해놓은 소위 어그로성 제목낚시. 켄 정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의사였고, <행 오버>를 대표작으로 활동중인 현업 코미디언 겸 배우이다. 쇼를 찍고, 넷플릭스에 올릴 영상물로서 편집해준 사람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감독이기도 한 존 추.

영화라고 하기엔 애매한 포지션인 걸 알지만, 미국식 코미디에 관한 단상을 적어보고 싶기에 올려본다. 뭐 그쪽 코미디 대다수가 그렇지만 상당히 저속하다. 니가 뭔데 감히 남의 코미디를 저속하다 아니다 재단하느냐 씹선비새끼야 뭐 이런 말을 하고 싶다면, 글쎄다, 만년 디씨질이나 하고 있는 앰생 밑바닥 찐따새끼인 내 입장에서도 저속해보이는데 이게 저속해보이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긴 할까? 가볍게 예를 들자면, 켄 정 저 양반은 무대에 처음 들어서며 이렇게 말한다. '씨발!(fuck!) 얘들아 이게 내 씨발 첫 번째 스탠드업 스페셜이야. 씨발 존나 사랑해!' 그리고 쇼 내내 입에서 육두문자가 떨어지질 않는다.

쇼는 가벼운 정치풍자와 욕설 섞인 인종개그 중심으로 진행된다. '내 아내의 성은 '호'야. 씨발 창녀(whore)라구! 그래서 난 씨발 내 아내한테 이리 와 이 창년아(come on, whore!)라고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와 씨발 안성기씨 이름이 '성기'시네요? 그런데 그건 좆이에요 보지에요? 라고 말하면서 웃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면서 딱히 의외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난 내내 켄 정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언젠가 군에 있을 때, 내 사수가 날 잡고 존나 재밌는 이야기를 해 준다며 썰을 풀던 일이 떠오른다. '야 니 맞차바라. 어느날 한 여자가 보라색 팬티를 입은기라. 그날은 보라색 구두를 신고 나오대? 그리고 또 다음날은 빨간색 팬티를 입더니 빨간색 구두를 신은기라. 어느날 씨발년 스커트를 팍 들치밧드니 씨발년이 암것도 안입었대? 그라믄 일마 구두가 뭐였겠노?'

하 씨발새끼 진짜.




단계별 스트레스 공감테스트 - <지옥의 묵시록> (1979년작,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마틴 쉰 주연)


베트남전, 한 엘리트 장교가 베트남전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고 탈영하여 원주민들을 포섭해 게릴라가 된다. 명망있는 장교의 탈선이 군 전체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한 정부에선 마틴 쉰에게 이 장교의 암살을 명령하는데.

워낙 유명하지만 또 워낙 오래된 영화라 이제사 보게 되었다. 무척 우울한 날이라, 뭔가 좀 더 우울한 영화가 없나 했는데 글쎄.

영화는 탈영장교 말론 브란도를 암살하러 가는 마틴 쉰과 수병 일행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진행된다. 제목이 <지옥의 묵시록>인 이유도 그들이 이동하며 전장의 지옥도를 마주친다는 그런 의미인 듯.

주인공 일행이 마주치는 사건들은 각각 의미하는 바를 가지고 있고, 관객들은 역사적 사전지식을 통해 그것을 이해한다. 개봉한 당시는 베트남전 후 1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었으니 역사랄 것도 없었겠지. 생각해볼만한 점은, 관객들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 사건의 상징성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객은 인물들의 행동도 이해해야 한다.

아무 정보도 없이 보았을 때, 인물들은 마치 무작위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가 '스트레스'라고 생각한다. 전쟁이라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극단으로 몰리는 사람들. 감정적 내러티브가 수없이 생략된 인물들의 드라마는, 관객이 직접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까지 몰려봤지를 테스트하는 것 같다. 인물들의 '그 행동'에 동기를 몰라도 공감할 수 있는가? 인물들의 상황은 점점 더 극단적이 되고, 더 큰 스트레스에 놓여봤던 관객들만이 영화를 끝까지 공감할 수 있다. 사실 당시에는 관람객 전원이 베트남전을 겪어본 세대였을테니 굳이 깊은 설명이 필요 없었겠지. 자연스러운 생략 아니었을까.

영화의 종반부, 미쳐버린 말론 브란도(탈영장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를 지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에 공감하는 듯한 마틴 쉰. 그들은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일까. 혹자는 영화를 반전주의적인, 특히 베트남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은 메시지를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영화의 종반은 분명한 헛소리로 채워져 있다. 말론 브란도의 대사는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논리적 평형기관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영화는 내내 베트남전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다, 스트레스에 몰린 나머지 마지막 순간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말론 브란도를 신앙하며 취재하려 드는 사진기사가 나온다. 그는 브란도의 대사를 '변증법'이라 칭하며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것을 들은 브란도는 역정을 내며 그를 쫓아버린다. 마틴 쉰은 브란도가 역겨운 반역자로서가 아닌 군인으로서 죽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지금에 와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명예로운 군인으로 돌아가 처형당하고 싶다는 말일까? 아닐 것이다. 그는 '군인이었을 시절에' 죽고 싶어했다는 말로 들린다. 아직 그의 평형기관이 망가지기 전에, 그가 거쳤을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지 말고 그냥 죽었었더라면 하는 후회일 것이다. 인물들은, 영화는, 이제 베트남전이 무엇이었고, 어찌 된 일이었던 별로 상관없게 되었다. 인물들은 그저 죽고 싶을 뿐이며, 영화는 베트남전에서 돌아왔던 사람들의 절망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들과 공감하고, 그 사실만으로 조금은 위로하는 그런 작품으로 기능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살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자살은 커녕 채혈핀으로 손가락을 찌르는 것 조차도 직접 하려면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외적인 이유로 죽는 것은 쉽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영상을 본다. 강도 등이 들어와 맨 먼저 본 사람의 머리에 총을 쏜다. 사람은 그 즉시 생명이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쓰러지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 죽는 것은 어렵지만, 남에게 죽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인 것이다. 잠이 들며 다음날 일어나지 않고 영원히 잠드는 일을 소망한다. 행복이 있다면 그런 일일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도, 나 같은 사람들도 그것을 바라고 있다.


사실 위의 해석은 모두 틀렸다. 영화는 말론 브란도의 죽음을 소의 도살과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진정 자비로운 죽음을 뜻했다면 브란도는 간결하게, 큰 고통을 보이지 않고 죽었어야 했다. 목이 반쯤 썰린 채로 몸부림치며 피를 뿜는 소와 동격이 되어서는 안됐다.

고로 위의 글 전부는 죽고싶은 도태-한남충의 뇌내망상인 것이다.

2019년 2월 12일 화요일

알았어 너 잘난 거 알겠으니 그만해 - <소림사3 남북소림> (1986년작, 유가량 감독/ 이연걸 주연)


탐관오리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소림사에서 수련중인 이연걸, 마침 원수의 근처에서 사자춤을 시연할 기회가 생겨 시연 중 암살을 계획한다. 하지만 시연장에는 이미 선객으로 온 암살자가 있었는데...

유가량 감독은 사실 영화를 찍는다기보단 무술 홍보물을 찍는 것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무술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가볍고 명쾌한 스토리와 환상적으로 짜여진 합 두 가지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그 두 가지가 온데간데 없다. 스토리는 여전히 가볍지만 명쾌함이 없고, 합맞춤은, 특히 촬영에서 엄청나게 허술하다. 내가 아는 유가량은 이렇게 영화의 핀트를 놓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인터넷을 뒤적여보니 소림사 시리즈 자체가 중국(홍콩이 아닌 중국 본토. 유가량은 홍콩에서 활동한 감독이다.)의 문화선전영화에 가까웠다는 말이 있다. 그런 느낌으로 보면 얼추 이해할만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주연인 이연걸과 메인인 복수극의 드라마를 완전히 등안시한 채로 사자춤 공연, 무술 품새 시연 등의 부차적인 요소에 러닝타임을 쏟아붓는데, 아마 중국 정부 측에서 따로 요구했던 사항이 아니었을까? 물론 덕분에 극의 몰입도는 개박살이 난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유가량도 더 이상 영화를 진행하기 싫었을 것이다. 7~80년대 영화에서조차도 그의 무술씬 연출력은 굉장했다. 카메라를 어디에 놓아야 배우들의 움직임이 가장 직관적으로 잡히는지 정확히 알았으며, 그 어떤 병기를 다루더라도 카메라의 동선설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만은 아니다. 너무 좁은 공간에 배우들과 카메라를 동시에 가둬놓고 찍느라고 화면에 움직임이 다 들어가지도 못할 뿐더러, 마치 아마추어가 카메라를 들고 단순히 배우가 움직이는 곳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듯한 촬영은 실제 고수들의 액션조차 사이비 무술단체의 몸부림 수준으로 전락시켜버린다. 성의없음이 눈에 보이는 영화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결국 남는 것은 뻔질나게 나와대는 이연걸과 그외 배우들의 품새 씬. 만리장성. 십여분간 집요하게 들이미는 사자춤 공연. 그래. 알았어. 중국 정말 멋있어. 세계 최고의 나라야. 그러니까 그만 좀 해.


엄청나게 좁은 사각의 방에서 지나치게 카메라와 가깝게 위치한 인물들.
아무리 '진짜'고수들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찍어놓으면...
보통 이럴 땐 벽 한쪽(카메라가 등진) 뚫어놓고 찍던데, 왜 그랬어요?

이것이 大中國의 少林哲學이다...!!!

2019년 2월 9일 토요일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란 말이다 - <십팔반무예> (1982년작, 유가량 감독/주연)

서양의 무기(총)을 쿵푸로 단련된 몸으로 막겠다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중국. 하지만 그 이면에는 비싼 총값 대신 싸게 부하들을 훈련시킴으로써 차익을 빼먹겠다는 고위관료들의 부패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를 알고 제자들을 의미없이 희생시킬 순 없다며 도망친 쿵푸명인 유가량. 정부에서는 이런 유가량의 존재가 병사들의 사기를 흐트러뜨린다고 생각하여 각 부서에서 암살자 하나씩을 뽑아 보내는데...

국적불명의 포스터지만 추억의 등장인물들을 가장 깔끔하게 나열해놨길래 들고와봤다. 기억나는가? 가운데 봉을 들고 폼잡는 사람이 좀 뽀샤시하게 나온 유가량, 왼쪽부터 그시절 여전사로 유명했던 혜영홍, 빡빡이는 유가휘,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지금 성룡의 자리에 있었을거라는 불운의 쾌남자 부성, 미간 찌푸린 남자는 유가영, 마지막으로 몸놀림이 엄청 좋았던 배우인 소후.

단순히 배우들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지만, 그것을 배제하고서도 영화는 여전히 재미있다. 가장 의외인 부분은, 영화의 대부분이 코미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슬랩스틱이 아직도 먹힌다는 것이다. 성룡의 <취권>, <사형도수>같은 작품을 기억하는가? 그 작품들의 코미디가 지금 봐도 건재하듯이, 이 영화의 유머도 그러하다.

하지만 재기발랄하고 진보적이었던 성룡의 액션과 달리, 이 영화의 액션은 무척이나 보수적이다. 제목부터 십팔반무예인 만큼 온갖 병장기들을 섞어놓고 벌이는 전통적인 합맞춤은 그저 경이로울 뿐. 누군가가 말하길 이 때의 중국영화는 격투가 아닌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이런 평가는 호평보다는 혹평에 가깝다. 너무 인위적이어서 현실감이 없다는 뜻이지.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그러면 뭐 어떻단 말인가.

요즘 중국 무술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인터넷에는 이종격투기 프로선수가 중국무술가들을 개패듯이 패며 무술의 실전성을 비웃는 영상이 발에 채일 만큼 널렸다. 심지어 몇몇은 보고 즐기라고 만들어놓은 영화에까지 달라붙어 현실성을 따지고 앉았다. '실제로는 저렇게 안 돼.' 우스운 이야기다. 중국 무술은 퍼포먼스적인 면은 물론,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생각해보라, 냉병기의 시대는 한참 전에 지나갔다. 지금 중국무술만큼 다양한 냉병기와 수기술의 조합을 정리해놓은 무예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비록 이제는 쓸모가 다했을지언정 그 시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고안한 결과물이 중국 무술인 것이다. 이제 와서 실제로 되고 말고가 무슨 소용인가. 무술은 문화요, 전통이며, 역사다. 연출의 잔재주 없이, 우직하고 보수적으로 시연되는 영화 속 십팔반 병기의 합맞춤이 시각적 즐거움 이상의 어떤 경외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그들의 칼춤을 보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우리는 코미디 섞인 가벼운 액션영화에서, 수천 년 역사의 편린을 느끼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는가. 좋지 않은 화질이지만 직접 보도록 하자. 


거의 정통무술 시연에 가까운 영상이 이어진다.
그야말로 눈호강이 아닐 수 없다.



공포 불합격 성장? 글쎄. - <그것> (2017년작, 안드레스 무스키에티 감독/ 소피아 릴리스 주연)


영 비정상적인 어른들만 있는듯한 한 마을. 첫 장면부터 기괴한 피에로가 한 아이를 잡아먹더니, 이후 마을의 아이들을 하나식 덮치기 시작하는데...

한참 전부터 보려고 생각했다가 이제사 본 영화. 이미 공포영화보다는 드라마에 가깝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공포에 대한 감상은 '불합격'. 작중의 피에로 페니와이즈는 상당히 괴기스러운 비주얼을 자랑하지만, 외형만으로 공포의 소재가 될 순 없었다. 어쨋든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인데도 불구하고 능력에 비해 아이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실력이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단순히 무섭게 생겼을 뿐, 잡히면 바로 죽는 것도 아니요, 아이들이 조금만 도망치면 굳이 쫓아오지도 않으니 영 스릴이 없다. 가끔 바로 죽이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행동에 일관성조차 없는고로, 영화 중후반엔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

성장드라마의 경우 '모르겠음'. 워낙 미국식 문제가정의 이야기이다 보니 한국적인 감성으로는 따라가기 힘들다. 한국은 자신의 능력에 비해 무거웠던 가부장의 무게에 견디지 못해 폭력적으로 망가진 아버지상이라던가, 자식을 위하는 것과 자기만족적인 것의 경계가 옅어지면서 집착증세를 보이는 부모상이 보인다면, 미국은 부모의 성격과 자식의 성격 간에 간극이 너무 커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그런 느낌. 과연 개인주의의 아성, 미국다운 이야기다.

정리하면 이 영화는 꽤 고어한 장면을 몇 개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용 영화로 보아야 맞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 마을의 모든 어른이 비정상적인데, 이건 아마 아이들의 시점에서 본 어른의 단점만 따로 떼어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아이들은 이런 부분에 공감하고, 자신들이 오갈 곳 없는 외톨이라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혼자 남겨졌을 때에 단순히 '괴상하게 생겼을 뿐'인 페니와이즈를 만나는 것도, 그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아이들에겐 엄청난 공포겠지. 또 이런 공포를 아이들의 힘으로 이겨낸다는 성장기는 의외로 같은 아이들에겐 상당한 카타르시스일지도.

영화는 15세 이상 관람가지만, 솔직히 7~12세 아동에게 가장 잘 먹힐 것 같은데. 자신이 이런 쪽에 관대한 부모라면 자식이 이 영화를 가장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나이에 보여줘보는건 어떨까?



영화의 분위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난 네가 무섭지 않아! 널 이렇게 빠따로 갈겨버리겠어!'
어른들에겐 좀 맥빠지는 전개일걸. 진짜로.

2019년 2월 4일 월요일

몰개성한 배역들의 그럭저럭 스릴러 -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2009년작, 케빈 맥도널드 감독/ 러셀 크로우, 벤 에플랙 주연)


어느 날의 어두운 뒷골목. 도망치던 흑인이 사살당하고 이를 목격한 피자배달부도 총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취재하게 된 러셀 크로우는 자신의 절친이자 현재 유력 국회의원 벤 애플렉과 사건의 관계성을 발견하는데.

영화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스릴러. 만듦새는 좋지만 또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놈의 불륜은 그만 좀 넣으면 안되겠는가? 아무리 현실반영이라지만 매번 여자관계 쑤셔서 헛점을 찾는 전개는 지겨울 때도 됐을텐데. 10년 전 영화에 뭘 바라겠냐마는. 워... 그러고보니 09년작도 벌써 10년 전 작품이 돼버렸네.

영화는 그래도 언론인으로서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던 러셀 크로우를 조명하며 끝난다. '나는 그래도 누군가는, 아직 이 신문에서 쓰레기같은 찌라시가 아닌 진짜 진실을 기대할 것이라 믿네'. 작중 크로우의 대사다. 씁슬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신문을 거대한 찌라시덩어리로 취급한다. 진실을 기반하던 말던, 왜곡된 통계, 왜곡된 시선으로 집필한 기사들은 결국 진실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그러니 차라리 자극적인 기사를 바란다. 그 편이 재미있거든. 나는 어느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실제의 사건들을 단순히 흥밋거리로만 보고있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참 실감되지 않는 일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글쎄요. 현실적이라기엔 각 캐릭터들이 크게 현실을 상징하지는 않는 듯하다. 특히 레이첼 맥아담스가 맡은 배역은 당최 성격이 뭔지, 뭘 말하고 싶은건지 알 수가 없고, 러셀 크로우 역시 딱히 줏대를 가지고 있는 느낌은 아니다. 캐릭터의 개성이 엄격하게 잡혀있질 않으니, 캐릭터의 행동들에서 그 속내를 읽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애매해보이는 캐릭터성조차도 현실반영이라는 것일까. 그런가. 나 같이 애매한 인간들의 군상극이었나. 그러면 현실적으로 불륜은 좀 빼주십시오 이 인싸 새끼들아...!

좀 스릴러 영화에 여자는 빠지거나, 나와도 이성관계는 드러내지 말아줬으면 한다. 로맨스가 있어도 재밌는건 호러영화 뿐이라니까 ㄹㅇ으로?

여자가 끼면 몰입이 안된다능...

과정이 있는 꼴림 - <아르바이트 아내의 정사 : 무르익은 섹스와 녹아내리는 한숨> (????년작, ????)


제목은 노골적이지만 게임은 의외로 섬세하다. 아르바이트생이 같이 일하는 유부녀와 친해진 끝에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다는 내용. 

아르바이트생에 몰입한 우리는 그의 눈으로 유부녀를 바라보고, 그녀에게 매료되고, 구애한 끝에 짐승같은 육욕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게임은 이러한 프로세스가 문제없이 진행되도록 유부녀의 꼴림포인트, 꼴릿한 시츄에이션, 파국의 종장에 걸맞은 배덕적인 엔딩의 과정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학적인 소양은 필요 없다. 헤르만 헤세가 써도 안 꼴리더라고. <지와 사랑>을 읽었는가. 태반이 떡(?) 이야긴데 똘똘이(?)는 미동도 안 하자너. 관능미는 개뿔, 기본만 하자. 그리고 이 게임은 기본이 딱 되어있다. 

유명한 댓글이 있다. '그래서 74를 했냐고 안 했냐고'. 그래서 우리의 알바생은 유부녀에게 74를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임신을 시켰을까 못 시키고 중간에 남편에게 들켰을까. 차분히 바지를 벗고 앉아, 원색적이면서 근원적인 성(性)의 질문에 몰입해보자. 이 게임이 여러분을 해답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단, 휴지는 스스로 지참하시라. 










평범의 끝은 걸작 - <영웅전설6 천공의 궤적 fc> (2004년작, 니혼 팔콤)


국가조직인 군과 민간조직에 가까운 유격사, 두 개의 무력조직이 존재하는 세계 속 작은 나라 리벨 왕국. 그 변두리에서 모종의 과거를 가진 요슈아와 에스텔의 유격사 시험이 시작된다.

이 게임의 가장 놀라운 점은, 내가 게임에서 특출난 장점을 찾지 못했음에도 매우 즐겁게 50시간동안 빠져있었다는 사실이다. 적당히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 스토리, 적절한 레벨 디자인, 즐길만 한 야리코미 요소, 엄청나게 머리를 쓸 필요는 없지만, 또 아예 생각없이 진행해서도 안 되는 퍼즐과 전투시스템. 이렇게까지 단점이 없는 게임은 처음이다.

덕분에, 연식에 비해 상당히 비싸게 팔리고 있는 작품임에도(30달러, 할인해도 20달러) 다음 작품을 구매할까 고민하는 수준이지만 리뷰에 언급할 거리가 전혀 없다.

고전게임에 입문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강력추천. 이 게임을 재미있게 즐기지 못한다면 아마 다른 고전게임도 즐기기 힘들 것이기에.






신규 쓰레기

노스텔지어, 그보다는 조금 더. - <에보랜드2>(2015년작, 시로게임즈)

모종의 미래기관에서 파견된 주인공, 하지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는 채 여주인공의 집에서 기억을 잃은 상태로 깨어나는데... 양키들이 jrpg감성을 따라하면 똥겜이 나온다. 차별이네 뭐네 하지만 동양인과 서양인은 사고회로 자체가 다른 게 맞다....

쓰레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