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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5일 금요일

추억의 작명기법 - <존 카펜터의 스네이크> (1999년작, 노엘 노섹 감독/ 새넌 스터지스, 해리 햄린 주연)


영화의 시작부분, 사고로 열대 아마존의 맹독성 방울뱀이 미국의 한 마을에 풀린다. 그리고 20년 후, 사고지역 근방의 마을에서 한 남자아이가 방울뱀에 물리고, 바로 인근에 있던 의료진이 뛰어갔음에도 그 짧은 시간 내에 사망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데....

솔직히 재밌을거라 생각하고 본 영화는 아니다. 각본참여자 중 한 사람이 존 카펜터라는 이유로 한국명을 <존 카펜터의 스네이크>따위로 붙여대는 쌈마이함만 봐도 졸작임이 틀림없을테니까. 근데 또 그게 추억을 자극하지 않는가? 예전에는 진짜 쓸데없이 ~의 ~ 하는 영화들 많았었는데. 심지어 그 중엔 재밌는 영화도 있었단 말이지. 뻑하면 스티븐 스필버그라거나 성룡같은 유명인들 이름을 팔아댔던 기억이 난다. 예시를 몇 개 적고 싶은데, 정확한 이름들은 귀신같이 떠오르질 않네.

영화는 딱 예상대로. <아라크네의 비밀>을 대충 방울뱀 버전으로 열화재생한한 느낌이다. 사고로 열대우림 지역에서 평범한 미국의 마을로 들어온 맹독성 동물이 이종교배하여 업그레이드된 맹독성과 공격성을 지니게 된다는 전체적인 설정부터. 하지만 이 영화, 최소한의 긴장감이나 당위성을 조성할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다. 20년동안 교배종이 뭘 하다 이제야 나타나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가? 뱀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과 마주치고 공격하게 되는가? 뭐 이런 질문들. 더 웃긴 건 영화 내에서 이런 문제점들을 굳이 언급한다는 것이다. 딱히 해결 못했으면 조용히 넘어가기라도 하던가. 허술함도 이런 허술함이 없다.

하지만 그 허술함이 우습다. 진짜 별 거 아닌 영화라도 뱀만 나왔다 하면 벌벌 떨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서, 눈물겹게 우습다. 좁고 눅눅한 방에 아놀드 슈워제네거 스티커가 붙어있던, 아마 15인치정도밖에 안 되었을 내 브라운관 티비가, 또 그 티비 속이 세상의 전부인 양 착 달라붙어서 영화를 보던 그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 버렸구나. 까짓거 영화가 좀 쌈마이하면 어떠랴, 나에겐 노스텔지어인 것을.

아아 노스텔지어


2019년 1월 24일 목요일

무슨 개소리세요? - <야성의 증명> (1977년작, 모리무라 세이이치 저)


어느 날, 작은 마을의 주민들이 대거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여자이는 한 보험조사원에게 입양된다. 이 보험조사원은 이제 딸이 된 여자아이와 함께 마을에서 살해당했던 사람들 중 유일한 외지인의 여동생에게 접근하고, 또 그러던 중 일이 꼬여 지역 야쿠자들의 일에 휘말린다. 그리고 경찰들은 대거살인사건의 주된 용의자로 보험조사원을 지목하는데...

좋은 점부터 말해 보자면 전개에 속도감이 있어 술술 읽힌다는 것, 그리고... 이제 나쁜 점을 말하도록 하자.

우선 사건에 매력이 없다. 프롤로그의 대량살인사건을 제외하면 사실 전부 그 실체가 명료하며, 야쿠자와 결탁한 지역 경찰들이 보험조사원을 압박하는 내용도 살해위협 원패턴이다.

다음으로 사건의 해결에 인물들이 기여하는 바가 좆도 없다. 결국 강간중독자인 야쿠자 아들내미가 사고를 쳐서 뜬금없이 모든 일이 해결되는데 이걸 보고 나한테 뭐 어쩌라고. 인간사회의 허무함에 대해서라도 알려주고 싶었는가?

셋째로는 별 아스트랄한 설정들이 넘쳐나고, 또 존나 의미없이 소비된다는 것이다. 보험조사원의 양녀이자 대량살인사건의 생존자인 여자아이는 그 트라우마로 초능력에 눈을 뜬다. 그리고 보험조사원은 사실 자위대에서 훈련받은 특수살인병기였다. 물론 작중 이 설정이 요긴하게 쓰이는 일은 없다. 미래예지능력이 있지만 그 미래를 알려줘도 보험설계사가 씹어버리고, 살인병기 설정은 결말부를 제외하면 오로지 '그는 프로의 위압감을 내뿜었다'같은 문장을 쓰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 같은 수준. 온갖 핑계를 대 가며 실력발휘를 못하고 야쿠자한테 개같이 쳐맞는걸 보면 힘숨찐이라는게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인가 싶다.

마지막은 허무맹랑한 결말이다. 초능력을 각성했던 양녀는 또 갑자기 기억을 되찾으며 보험조사원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보험조사원은 야쿠자들의 보험사기를 조사하던 중 살인병기의 본능이 끓어올라서 갑자기 앞의 졸개들을 도끼로 찍어죽이기 시작하다 현장에서 체포당한다. 그리고 반 년 후 야쿠자는 '그냥' 보험사기극을 포함한 모든 범행을 들키고 감옥행. 시발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77년엔 그렇게 볼 게 없었나. 아니면 한창 버블경제 시기라서 책에다 똥을 싸서 팔아도 수백만권씩 팔리던 시대 쯤 되는가? 야성 시리즈 하면 꽤 유명한 삼부작인데, 이정도로 거품덩어리인 소설은 간만이었다.

???????????????????????????????????????????????????????



2019년 1월 23일 수요일

쌈마이라고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 <인 어 밸리 오브 바이얼런스> (2016년작, 티 웨스트 감독/ 에단 호크, 존 트라볼타 주연)


멕시코로 도망치는 중인 탈영병 에단 호크. 황무지를 건너는 도중 식료품이 떨어져 한 마을에 들렀던 그는 운 나쁘게도 마을 보안관의 불량한 아들과 시비가 붙고, 아들은 그 보복으로 에단 호크의 개를 죽여버린다. 분노한 에단 호크는 총을 들고 마을사람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하는데...

전형적인 복수극이지만 여러 모로 아쉬운 영화다. 일단 복수극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 가오에 죽고사는 남자들의 자존심 싸움도 애매하고, 문답무용으로 쏴죽이는 비정함도 없으며, 그렇다고 복수라는 행위에 대해 고뇌하는 휴머니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캐릭터도 어정쩡하다. 복수극의 주체인 에단 호크는 딱히 화나보이지 않으며, 존재만으로도 카리스마틱한 존 트라볼타는 단순히 마을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늙은 보안관 역으로 오히려 복수극을 지지부진하게 만들어버린다. 의외로 메인 악역은 처음 에단 호크에게 시비를 걸고 이후 호크의 개까지 찔러죽이는 트라볼타의 아들인데, 이 아들내미는 시종일관 아버지 빽만 믿고있는 찌질이로 그려진다. 그럼 빽이었던 아버지라도 그럴싸하던가. 위에 말했듯 존 트라볼타의 역할은 정말 별 거 없거든.

결국 애매하게 화난 에단 호크가 그러지 말아달라고 말리는 존 트라볼타를 뿌리치고 마을 사람들을 쏴죽이는 영화가 된다. 관객한테 뭘 봐달라고 이런 걸 찍어온거야. 요즘 서부극이 다 그저 그렇네. 순도 높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기엔 세상이 너무 변해버린 것일까.

진짜로, 영화 내내 아무것도 없다니까.

2019년 1월 18일 금요일

추리 혹은 스릴러의 사건은 단순히 난해하기만 한 게 전부가 아닌 듯.

단순히 난해한 사건은 결국 의문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김이 식어버림.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그 이후부터는 볼 것도 없으니까.

그러니 스릴러물의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방향 해석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함.
끝까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건은 존재하기 힘든데다 존재한다 쳐도 이해되기 어렵고, 따라서 오히려 언뜻 명료해보이거나 특정 방향으로 유도되기 쉬운 사건이 사람들의 구미를 당김.

특히 살인사건의 구성에서 이런 게 심함.
첫 희생자는 밀실에서 죽고, 두 번째 희생자는 어떻게 유도되었는지 몰라도 어쩌면 랜덤으로 배분될 수도 있었던 여러 잔의 컵 중 독이 든 특정 컵의 음료를 먹고 죽고, 세 번째 희생자는 불이 타는 방에서 왜인지 탈출을 하지 않고 죽고... 전부 '단순히 난해한' 사건임. 어떻게 밀실에서 살인을 했을까, 어떻게 특정 컵을 들도록 유도했을까, 어떻게 불이 난 방에서 멀쩡한 사람을 탈출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일견 굉장히 흥미로운 소재지만 이것들을 해결하는 과정은 그렇지 않게 됨. 많은 추리물에선 단편적인 단서들만을 제시하고 후에 탐정이 이것들을 재조립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흥미가 식거나, 듣고 보니 식상하거나, 아주 나쁜 경우 듣기도 전에 이미 보일 만큼 구리거나. 어느 쪽이 됐던간에 처음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미스터리함은 어디론가 증발하고 없음.

그래서 중요한 것이 다중해석이 가능한 사건의 존재임. 밀실의 앞에 깨진 유리가 잔뜩 있었다고 독자들이 그 유리에 대해 깊게 생각하진 않음. 작품 속의 탐정 혹은 형사 등 사건을 추리하고 생각하는 캐릭터는 마땅히 독자에게 어떤 방향성을 제시해야 함. 그럼으로써 단서에 대해 설명하는 겸 독자, 혹은 시청자들이 주도적으로 사건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그렇다고 다중해석이 가능하기만 한 것도 문제임. 최소한 그 중 한 개의 해석은 사건의 메인스트림과 맞닿아있어야 함. 이를테면 아까 예를 들었던 밀실 앞에 깨져있던 유리조각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유리조각에 대한 다중해석으로 뭐 유리잔의 조각일 것이다, 없어진 수조의 조각일 것이다, 전혀 다른 유리조각을 수조의 유리조각 속에 흩뿌림으로써 전혀 다른 유리조각의 출처를 숨기려 했을 것이다 등등을 설정했다고 치자.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간 여러 가지 작품에서 등장했던 유리조각 트릭들을 늘어놓은 것 외에 독자들이 이것을 보고 무엇을 느끼겠는가?

자, 마지막으로 사건의 메인스트림에 닿는 해석을 추가해 보자. 주인공, 혹은 형사 등은 유리조각에 대한 일련의 감상을 늘어놓은 다음, '범인은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밀실의 앞에서 유리를 깼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것을 기반으로 수사하지만 도저히 유리와 밀실이 연관되지 않으며, 오히려 밀실살인을 만들고서 자칫 소리가 커서 현장을 들킬 수 있는 유리를 그 자리에서 깼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 사건은 다른 국면으로 치닫을 수 있다. 만일 밀실이 피해자 본인이 만든 밀실이고, 밀실의 입구에 다가갈 수 없도록 유리를 깔았다면? 급격하게 자살, 혹은 그런 죽음을 유도할 수 있는 범인을 찾는 방향으로 사건이 변질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 밀실살인이 일어난 것과 유리조각이 생긴 것이 과연 같은 시간에 일어난 일일까. 사람들을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밀실살인사건의 현장에 어떤 조작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밀실 앞에서 유리를 깨는 것은, 밀실에 들어가지 않고도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유리가 무슨 유리였냐는 것은 결국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유리가 사건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는 것이다. 어떻게 밀실을 만들고 그 앞에서 유리를 깼을까? 이런 문제는 해결되는 과정에서 금방 흥미가 식는다. 단서는 그저 사건의 구성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해석에 따라 사건 전체의 방향성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 단서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작품에 몰입해줄 것이다.

그냥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막 흘겨쓰다 보니 두서없고 문체도 뒤섞여있는데 그냥 그렇다고요.

와타시의 라라쟝을 돌려내는데스우 - <라이즈 오브 더 툼 레이더> (2015년작, 스퀘어에닉스)


전작 <툼 레이더 리부트>에서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직접 겪고 확신하게 된 라라 크로프트. 따라서 아버지가 크로프트 가문을 몰락시키면서까지 집착한 영생에 관한 연구도 틀림없이 실재할 것이라 확신한다. 어처구니 없는 학설을 주장한다며 학계에서 매장당한 아버지. 라라는 그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나게 되는데, 베일에 쌓인 조직 '트리니티'가 라라의 뒤를 밟아 맹공을 가하기 시작하고....

개인적인 평가는 그럭저럭. 이틀간 몰입해서 달릴 수준의 재미는 있지만 전작보다는 못한 느낌이다. 폭풍으로 흘러간 섬에 광신도들과 요괴가 있어 모조리 죽여버리고 탈출한다는 <툼 레이더 리부트>의 명쾌한 스토리에서 아버지와 양어머니와 신비의 조직들이 얽혀 조금 지지부진한 스토리로 다운그레이드되었고, 줄타기, 뛰어다니기, 암벽타기 정도뿐이었던 기존의 시스템에 추가된 몇 가지 파쿠르 기술들은 게임의 액션성에 딱히 도움이 되질 못한다. 퍼즐과 플랫포머 중심으로 회귀했다는데, 난 둘 다 전작히 훨씬 나았다고 봄. 전작 하면서는 육성으로 감탄사를 내지를만한 상황도 꽤 있었는데.

라라 모델링의 너프도 대단히 짜증난다. 아니 게임 속 캐릭터가 좀 예쁘고 섹시하면 어때서 어떻게든 가리고 평범하게 만들려고 애써 지랄들인지. 모든 주인공을 못생기고 뚱뚱하며 여드름투성이에 돼지 멱따는 목소리를 내고 정신박약이 있어 입에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동양인 여성캐릭터로 만들어야 만족할 셈인가. 비슷하게 생겼는데 원숭이같은 두형에 발가락 두께의 입술, 새까만 피부색의 흑인 여성캐릭터와 레즈비언 연인사이라는 설정이라 스킵불가 컷신으로 적나라한 배드씬이 진행되는거지. 어떤 미친놈이 그 게임을 사줄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서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평범하거나 평범조차 따라가기 버거운 수준이니, '주인공'으로 설계된 특별한 캐릭터들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 이해는 한다만, 그래서 주인공인 것 아니겠는가? 평범한 상대에겐 평범한 매력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또 그렇다고 캐릭터가 무슨 수백 수천시간을 들여서 유저들에게 비(非)외형적 매력을 어필할 것도 아니잖아? 무슨 실시간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야?

주인공이 주인공다울 수 있도록. 묘하게 탈인간적이면서 신적인 매력을 발산할 수 있도록, 괜히 못난 열등감만 앞세워 캐릭터메이킹의 첫 단계부터 개작살내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PC충 개새끼들아.


p.s. 본인은 플레이하면서 게임 진행에 치명적인 몇 가지 버그를 겪은 일이 있다. 마지막 보스전에서 갑자기 보스가 실종된다던가 하는 식. PC버전으로는 최적화가 아주 잘 되진 않은 모양.

이랬던 라라쟝이


 ....??

볼륨감도 많이 줄었다.
전작에서 좁은 틈 통과할때면 진짜 위아래로 울었는데.

총평: 이름값은 함.


2019년 1월 17일 목요일

블롬캠프 감독의 추락엔 바닥이 없다 - <채피> (2015년작, 닐 블롬캠프 감독/ 휴 잭맨 주연)


배터리 고장으로 폐기 직전이었던 경찰용 로봇 채피. 하지만 AI개발에 성공한 한 프로그래머가 이 로봇을 가로채 CPU에 인공지능을 설치하고, 그걸 본 갱단이 또 중간에 끼어들어 자신의 입맛대로 AI를 학습시키기 시작하는데. 폐기예정이었던 몸체 덕분에 시한부 인생이 된 채피의 미래는...?

미래기술에 대한 현실적 묘사도 없고, AI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도 없으며, 갱스터에게 키워짐으로서 벌어지는 각종 해프닝에 대한 상상력도 없다. 덕분에 전개는 가볍고 지루하며 유머는 유치하고, 이런저런 인물들에 의해 채피라는 캐릭터가 형성되는 과정도 개연성이 없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커버할 감각적인 개성이 존재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채피가 인공지능으로서 갓 태어나 무언가를 학습하고 그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메인으로 삼은 영화인 듯한데, 아마 그 누구도 채피의 성장과정에 공감하지 못 할 것이다.

닐 블롬캠프 감독만큼 작품성이 엄청난 폭으로 곤두박질치는 감독도 찾아보기 힘들 듯.


2019년 1월 15일 화요일

있어보이는 - <트루 스토리> (2015년작, 마이클 굴드 감독/ 제임스 프랭코, 조나 힐 주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짜깁은 기사를 썼다가 직업을 잃게 된 주인공. 재기를 위해 기삿거리를 찾던 중 멕시코에서 자신의 이름을 대며 생활하다 붙잡힌 친족살인 용의자의 소식을 듣고 그를 취재하게 되는데...

이런 부류의 영화에는 약하다. 영화는 명료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특정한 사건과 그 결과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영화 속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려 한다. 인물들의 대화는 물론 진행과 결말까지 모호하다.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대사들로 가득찬 영화인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로 끝내주기에, 우리는 배우들의 감정조차 그들의 대사를 통해 유추해야 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 화면은 언제나 인물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지만, 우리는 그 미묘한 움직임에서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진실'이라는 단어의 뉘앙스와 그 정의의 간극에서 나오는 갈등을 다룬 영화다. 프랭코의 증언은 분명히 거짓이지만, 그가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진실이기에 그의 증언은 <트루 스토리>라는 책으로 편찬되니까.

하지만 꽤 다양한 논제를 던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과학철학에서 그토록 외치듯이 진실이라는 것은 단순가변적인 개념일 뿐일까? 인간은 어째서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 공감할 수 있을까? 판단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행위일까? 영화의 진중한 문체는, 최소한 우리가 평소 잠깐씩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넘겨버리는 몇몇 질문들을 들춰내기에 충분했다.

과연?




2019년 1월 10일 목요일

혜자?애매, 창렬? 애매 - <늑대 게임> (2018년작, studio wasabi)


눈을 떠 보니 건물에 감금되어 있는 주인공들. 스스로를 울프와 메리라고 소개하는 인형들이 말하길, 탈출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 마피아 게임을 플레이해야 한다는데....

'늑대'를 뽑은 사람은 양 한 마리를 죽여야 하고, 이후 양은 재판에서 늑대를 가려내야 한다. 재판이 끝나고 늑대가 밝혀지면, 울프와 메리의 재기발랄한 늑대 처형 씬이 이어진다. <단간론파>와 몇 가지 디테일을 제외하면 뼈대는 똑같다.

게임의 가격은 0원, 하지만 게임 내에서 수시로 틀어대는 광고를 없애기 위해선 2500원이 필요하다. 2~3분에 한 번씩 틱톡 광고가 뜨는 순간 게임이고 나발이고 <모탈 컴뱃>의 테크노 ost를 최대볼륨으로 튼 다음 주변의 아무에게나 페이탈리티를 먹여버리고 싶어지니 그냥 게임 가격이 2500원인 셈 치자. 고로 게임은 2500원짜리 쌈마이 파쿠리겜이라는 것이다.

이 쌈마이함을 마음에 새기고 기대치를 낮춘다면, 2500원 어치의 값은 충분히 해내는 듯 싶다. 특히 항상 수동적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는 단간론파류 게임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내가 늑대 카드를 뽑고 주도적으로 살인을 계획하며 눈치를 보는 상황에 돌입하면 생각보다 상당한 서스펜스를 안겨 준다.

특기할 점은 이것뿐이다. 나머진 그냥 쌈마이. 캐릭터들의 개성은 그럭저럭 구별은 되는 수준이나 볼륨이 캐릭터의 숫자를 감당하지 못한다. 흑막의 동기는 그저 그렇고, 게임 전반적으로 뿌린 떡밥은 유야무야 별 임팩트 없이 회수된다.

본편의 진엔딩까지 진행했고, 서브스토리팩(8900원)은 어떻게 봐도 배보다 배꼽이 큰 꼴이 될 것 같아서 구매하지 않았다. 그래도 평이한 내용물에 비해 2500원이면 혜자일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재밌게 즐겼던 또다른 단간 파쿠리겜 <탐정의 왕>은 무려 9900원이었으며, 얼탱이없는 전개와 싸가지없는 창렬분량으로 날 화나게 한 후속편 <범죄의 왕>은 8900원이었다. 일러스트나 UI에서 느껴지는 싼티를 유머로 승화시키면서 잘 짜인 느와르를 만들었던 <불의 단서>시리즈도 각각 4500원 정도는 했으니, 이쪽 방면 게임을 좋아하는데 한 번쯤 해볼만 할까요라는 질문에 난 아마 YES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래봬도 같은 회사의 전작보다 훨씬 발전한 물건이라는 평가가 있던데, 까짓거 2500원 투자해줬으니 다음 게임으로 훨씬 나은 뭔가를 뽑아줬으면 감사하겠다. 텍스트겜 엄청 좋아하는데 이제 사실상 다 죽어버렸단 말이야.

바로 이전에 <고질라: 행성파괴자>에서도 쓴 말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저물어가는 중이니까, 난 이런 게임이라도 나와준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이다.

KFC의 맛은 없지만, OFC정도의 유쾌함은 있는 게임이다. 단돈 2500원에.

해야될 이야기는 안하고 - <고질라: 행성포식자> (2018년작, 시즈노 코분, 세시다 히로유키 감독/미야노 마모루 CV)


인간/빌루살루도/엑시프의 3종족 연합군이 고질라를 상대로 결전을 벌이는 상태. <고질라: 괴수행성>에서 인간의 전략이 실패하고, <고질라: 결전기동증식도시>에서 빌루살루도의 전략이 실패했다. 그러면 이제 엑시프의 전략만 남았는데, 그들의 신 '킹 기도라'를 지구로 불러들이자는 엑시프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

우로부치 겐의 각본이라는 점과, 전작들에서 보여 온 작품의 지향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서도 참 안타까운 결말이다. 스토리의 결말이 안타깝다는 것이 아니고, <신 고지라>를 기점으로 어느정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괴수물을 이렇게 조져놨다는 결말이 그렇다는 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시리즈는 좆망했다.

내가 아는 우로부치 겐은 '절망'이라는 주제를 꽤 잘 다루는 작가였다.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상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그려내는 사람이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좌절과 절망의 맛이 그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던가. 자신의 보금자리와 가족을 잃어버린 인간의 고지라에 대한 맹목적 공격성, 과학적 진보를 신봉하는 빌루살루도의 극단적 기술만능주의, 탐구의 끝에 다다른 엑시프의 니힐리즘. 1,2,3편 전부 충분히 다룰 만한 주제지만 풀어가는 방법이 완전히 틀렸다. 너무 많이 틀려서 어디서부터 틀렸는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복선의 부재를 꼽겠다. 인간/빌루살루도/엑시프 3종족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실했기에 그들의 지향점이 인간과 틀어지는 각 작품의 클라이막스가 전혀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종족간의 차이점을 좀 더 부각해야 했다. 그래도 제목에 고질라 3글자 들어간답시고 무의미하게 괴수 얼굴이나 찍어대지 말고, 그 시간에 관객들이 인간 측에 몰입하여 다른 2종족과의 이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관객들은 괴수의 강함으로부터 오는 압박감보다는 삐걱거리는 연합군의 위태로움에서 긴장감을 느껴야 했으며 그럼으로써 결국 믿을 놈 하나 없었던 현실 앞에 패배하는 작중의 인간들과 함께 절망해야 했다.

영화는 결국 고질라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끝난다. 납득되지 않는 결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결말은 납득할 수 없다. <고질라: 행성포식자>는 영화의 1/3가량을 관객들에게 니힐리즘을 납득시키려는 나레이션으로 채웠다. 하지만 난 엑시프들이 갑자기 왜 지랄인지, 나레이션이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건지, 또 그거에 주인공은 왜 설득당하려다 또 어디서 어떤 개소리를 듣고 다시 반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듯하다.




2019년 1월 2일 수요일

대통령도 외모가 중요하다 - <긴급명령> (1994년작, 필립 노이스 감독/ 해리슨 포드 주연)


어느 날, 마약 관련 범죄로 대통령의 절친이 살해당하고, 스캔들을 의식한 대통령은 이것을 재선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의원 몇 명과 결탁하여 콜럼비아의 마약카르텔을 대상으로 불법 군사작전을 펼친다. 마침 CIA 국장 대행을 맡고 있었던 해리슨 포드는 의도찮게 이 일에 휘말리게 되는데...

어릴 땐 이해할 수 없었던 영화.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야 전반적인 내용이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걸작이냐 묻는다면 글쎄, 역시 그건 아니지 않을까? 차분하고 명료하게 전개를 짚어나가는 연출이 있는 대신, 인물들의 캐릭터가 밋밋한 편이고, 사건전개도 의외성이나 긴장감이 없다. 요약하자면 자극이 부족하다는 것.

너무 재미없지도, 또 엄청 재밌지도 않고, 뭔가 영화에 따라오는 추억도 없고, 특별한 감상도 없고. 이렇게까지 감흥 없는 영화는 또 간만이네. 뭐라 말하겠는가. 이만 줄인다.

그래, 대통령 역할을 맡은 배우는 <더 씽>에서 소파를 싫어하시던 그 할배다. 덕분에 대통령이 어딘가에 앉을 때마다 묘하게 웃겼다. 고작 지지율 좀 끌어올리자고 의원들 눈칫밥까지 먹어가며 그 생쇼를 해야되다니, 이 얼마나 딱한 대통령인가.


그냥 잘 생기면 되는건데말이지.

신규 쓰레기

노스텔지어, 그보다는 조금 더. - <에보랜드2>(2015년작, 시로게임즈)

모종의 미래기관에서 파견된 주인공, 하지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는 채 여주인공의 집에서 기억을 잃은 상태로 깨어나는데... 양키들이 jrpg감성을 따라하면 똥겜이 나온다. 차별이네 뭐네 하지만 동양인과 서양인은 사고회로 자체가 다른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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